
한동안 단절과 침체를 겪었던 우리 술이 K-문화상품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향하고 있다. 그런데 아는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지며, 우리 술이 다시 주목받기까지는 크고 작은 술독에 매달려 씨름하는 많은 이들의 열정과 고군분투가 녹아있다는 것을. 그 치열한 현장을 찾아, 우리 술의 내일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문제적 술꾼들을 소개한다.
요즘 핫한 ‘성시경 막걸리’, 어디서 만들까?
요즘 주류업계 큰 화제이자 관심사 하나는 이른바 ‘성시경 막걸리’이다. 연예계 소문난 애주가 가수 성시경이 직접 개발과정에 참여해 내놓았다는 ‘경탁주 12도’가 대중의 호기심을 끌며 지난 2월 22일 출시와 함께 초도 물량이 완판됐다.
이어 매일 오전 11시 공식 스토어에서 풀리는 물량도 빠르게 매진되며 ‘막겟팅’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온다. 막겟팅이란 막걸리와 티겟팅을 합친 단어. 임영웅이나 나훈아 콘서트 티겟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막걸리 사기가 어렵다는 경험담에서 나온 말이다.
주류 온라인 구매에는 성인 인증이 필요하다.
귀찮은 절차를 수반하는 것. 무엇보다 막걸리치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500㎖(우리가 마트나 편의점에서 쉽게 만나는 페트병 막걸리는 보통 750㎖) 2병 한 세트에 2만8천원. 택배비 3천500원은 별도다. 만만치 않은 가격임에도 ‘경탁주 12도’는 막걸리에 대한 가격 저항을 쉽게 뚫고 있는 것.
‘경탁주 12도’는 주류 스타트업 제이1농업회사법인이 내놓은 막걸리다. 쌀 함유량이 46%에 달하고, 인공감미료 없이 쌀과 누룩, 물로써만 맛을 냈다. 도수는 일반 막걸리의 두 배인 12도로 묵직하다. 그래서 가볍게 즐기려면 막걸리 잔에 얼음 하나 띄우면 안성마춤이다.
사실 우리 막걸리의 발전과 도약을 위해서는 천원짜리 한두장으로 구입하는 저가 막걸리만으로는 안된다. 프리미엄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품질만으로는 가격 저항을 뚫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잘 짜여진 듯 보이는, 현명하고도 치밀한 ‘경탁주 12도’의 전략이 더욱 주목되는 것.
업계의 관심은 과연 ‘경탁주 12’가 주류시장의 흐름까지 바꾼 박재범의 ‘원소주’에 비견되는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결론부터 말하자. 경우가 좀 다르다. 우선 소주와 생막걸리, 특성부터가 다르다.
소비기간이 짧은 생막걸리를 오프라인으로 대량 유통하는 것은 어느 큰 기업도 쉽게 엄두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경탁주 12도가 대단하더라도, 의미 있는 점유율을 만들어내기는 기대난망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경탁주 12도’를 내놓은 제이1농업회사법인은 빠르게 ‘경소주’를 준비하고 있다. ‘경사케’ ‘경하이볼’ ‘경위스키’까지 상표 등록도 해놓았다고 한다. 사실 가수 성시경이 좋아하는 것은 ‘술’이지, 꼭 막걸리만은 아니다.
이제, 관심은 ‘경탁주 12도’ 같은 기획력을 탄탄하게 뒷받침해준 양조장으로 이어진다. 이 막걸리를 내놓은 제이1농업회사법인은 자체 양조장이 없다. 충남 당진에 위치한 신평양조장에서 위탁 생산한다. 흔히 말하는 OEM방식이다.
신평양조장으로서는 위탁 생산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경탁주 12도’ 출시 3개월 전에는 캐주얼 다이닝 한식주점 브랜드와 협업해서 ‘아울막걸리’를 내놓기도 했다. 전통주 양조장으로서 자사의 제품 외에 이처럼 위탁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손꼽는다. 100년 가까운 역사의 신평양조장은 바로 그런 곳이다.
연잎 넣은 술로 이름난 100년 양조장
신평양조장은 1933년 창업해 3대가 맥을 이으며 100년 가까이 한 자리에서 술을 빚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양조장이 자리잡은 곳은 충남 당진시 신평면 금천리.
전국적으로 신평(新平)이란 지명은 곧잘 등장한다. 새로 생겨난 평야를 말한다. 토지가 비옥해 좋은 쌀이 나는 곡창지대인 곳이 많다. 게다가 금천리. 마을 한가운데에 쇠내(金川)가 흐른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땅이 비옥해 좋은 쌀이 나고, 맑은 물이 풍부하니 술 빚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신평양조장은 번창했다. 신평오일장 자리에 들어선 양조장 앞에는 술을 받고자 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김순식 창업주는 그렇게 모은 돈을 희사해 1957년 절을 세운다. 신평면 금천리에 있는 흥국사다. 절에서는 연꽃을 키웠다.
신평양조장의 2대 대표 김용세 옹(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9호)은 집안 내력대로 스님들과 교유하며, 일찍이 사찰문화를 접하게 된다. 사찰에서 만든 곡차 중 연술에 마음이 꽂혔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연꽃과 연잎을 활용해 음식과 술을 만들었다. 그것을 토대로 연구를 거듭, 연잎으로 막걸리와 약주를 만든다. 지금 신평양조장의 대표 상품이기도 한 ‘백련(白蓮)막걸리’와 ‘백련 맑은 술’이다.
“아버지께서는 예로부터 이어져 온 연잎주를 상품화하기 위해 여름에 딴 연잎을 차와 같이 덖어서 술빚는 방법을 고안하셨습니다. 생연잎과 달리 연잎을 덖어 건조시키면, 1년 사계절 상시로 술을 빚을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연잎을 덖어낸 과정에서 생긴 고유한 향과 맛을 살릴 수가 있지요. 초기에는 항아리에 연잎을 깐 다음 고두밥을 층층이 넣어 발효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술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기에 지금은 고두밥에 건조시킨 연잎을 썰어서 함께 섞지요. 연잎 자체가 발효되는 것은 아니지만, 막걸리 맛을 깔끔하게 합니다.”
신평양조장에서는 현재 4종류의 제품을 생산한다. 페트병에 든 ‘백련생막걸리 스노우’ (6도). 이 막걸리는 2009년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판매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병에 2천500원 정도로 4종 중 가격이 가장 저렴하다.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든 ‘백련막걸리 미스티’(7도)는 프리미엄 막걸리에 속한다. 단가가 몇배 비싼 당진의 해나루쌀을 사용해 빚었다. 2014년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막걸리다. ‘백련살균막걸리 미스티’(7도)도 있다.
막걸리 심사를 생탁주와 살균탁주로 나누어서 하던 시절인 2012년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막걸리다. 소비기간이 1년이라 미국과 호주 등 해외 수출도 많이 한다. 2018년 한중일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것도 이 막걸리였다.
한편 ‘백련 맑은 술’(12도)은 주종 분류상 약주에 속한다. 세계 3대 주류품평회인 IWSC에서 동상을 수상했는데, 2014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생일 만찬주로 알려지면 ‘회장님의 술’로 매출이 급증했었다.
당진에서 나는 쌀만으로 술을 빚는 신평양조장, 제품마다 연잎을 사용하고, 내세우지만 사실 연잎의 맛과 향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약주인 ‘백련 맑은 술’은 장기 숙성시키기에 막걸리와는 달리 연의 향이 조금 더 느껴진다고.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창업해서 일궜고, 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이십여명에 불과 주류분야 식품명인으로 제품의 가치를 높였다. 그렇다면, 이제 3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양조장집 2녀1남의 귀한 아들로 자란 김동교 대표는 좋은 대학을 나와 국내 최고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늘 가업인 양조장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술 익는 냄새를 늘상 몸에 지니고 자랐다.
“6살 때까지 신평에서 살았는데, 기억을 더듬으면 양조장은 늘 잔치 분위기였어요. 손님이 줄을 이었고 활기찼죠. 평상 위에 몽글몽글 올려져 있던 술밥도 기억납니다. 양조장 마당에서 뛰놀다 허기지면 맛있게 먹었지요. 외지 생활을 하면서도 방학이나 명절 때면 고향에 왔는데, 초등학교 때 음복주를 단숨에 마시고 쓰러진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자랑과 같은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는 걸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굳은 생각을 이길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전통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보존’의 대상일 뿐입니다.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야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소통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살아 있는 전통이지요. 제가 할 일이 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동교 대표가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은 막걸리 바람이 거세게 불던 지난 2010년이다. 삼성전자에서 4년, 이전 이력까지 더하면 마케팅 업무만 10년을 한 전문가로서 영업 현장 최일선에서 뛰며 냉철히 시장 상황을 분석했다.
아무리 봐도 이미 시장을 장악한 대기업 저가 막걸리와의 경쟁은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대한 자본을 계속 투입하며 제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단가를 마냥 낮출 수만도 없는 일.
김 대표는 우리 술의 가치를 알리고,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일 수 있는 막걸리 전문주점 ‘셰막Chez Maak’을 유동 인구가 많은 강남역 인근에 오픈한다. 신평양조장 막걸리와 약주를 유명 호텔 출신 셰프의 퓨전 안주와 함께 냈다. 아울러 SNS 등을 활용해 젊은 층에 어필하는 공격적인 마케팅도 펼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숨에 젊은 층은 물론 여성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며 신사동 가로수길에도 셰막 2호점을 냈다. 덩달아 신평양조장의 매출도 껑충 뛰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트렌디한 서울 한복판에서 전국구 막걸리로서 백련막걸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고.
“코로나를 거치며 막걸리주점은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시장에서 인정받으며 각종 주류품평회에서 더욱 주목받아 좋은 성과를 내게 되었고, 만찬주로도 각광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막걸리 양조장의 유물
신평양조장의 새로운 조타수로서 김대표의 실험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6차산업의 시대, 전통 양조장이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전통문화 콘텐츠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신평양조장이 2013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된 게 그 첫걸음. 그것을 계기로 옛 미곡창고를 리모델링, 대한민국 근현대 양조장 문화와 역사를 관람할 수 있는 전시공간과 저렴하게 양조장 제품은 물론 각종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양조뮤지엄으로 변모시켰다.
2021년에는 당진시의 쌀산업 발전과 농촌관광 활성화를 위해 현대적 설비와 함께 생산과정을 견학하고 양조체험을 할 수 있는 양조센터를 개관했으며, 양조갤러리도 마련했다.
브루어리 투어 개념의 양조장 견학과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1930년대 양조장 건물과 고택도 원형 그대로 있어 세월의 더깨와 함께 양조장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마침, 때 맞춰 방문하셨네요. 신평양조장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습니다.”
내용물이 반쯤 담긴 술병 하나를 가지고 왔다. 투명한 증류주다.
“당진의 특산물로 황토고구마가 유명합니다. 제가 그동안 틈틈이 연구하고 준비해서 고구마 증류소주를 완성했고, 곧 출시할 예정입니다. 25도와 40도 두가지입니다.”
새로운 시도, 이번에도 기대된다. 신평양조장은 그렇게 세 번째 아버지가 앞장 서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고, 언젠가 4대가 그 바톤을 이을 것이다. 이미, 양조뮤지엄 전시관에도 네번째 자리에 해맑은 아들의 사진을 올려놨다. 그렇게 아버지의 시간, 양조장의 시간이 익어간다.




